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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 이야기

면허 받지 못한 자.

후덕후덕 2017. 10. 3. 23:36

면허 받지 못한 자.





<면허 받지 못한 자>

이 환자는 선생님이 케이스로 맡아서 해보시고 다음주에 발표 해보시겠어요?”

PK가 되고 세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봄이었다. 아직도 어두운 병원의 새벽조차 이기지 못했던 흰 가운에도 점점 구김이 늘어났을 때 실습 턴이 바뀌었고 이번엔 정신건강의학과 차례였다. 정신건강의학과는 다른 전공과는 달리 환자의 history taking에 대한 상이한 방식을 요구했다. 그건 환자의 일생에 걸친 일련의 사건과 희로애락을 그들의 두 눈을 마주하면서 차분히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질문의 종류와 대화의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하고 부디 배정받은 환자가 협조적이기를 소망하며 병동으로 들어갔다. 병동 안은 의료진의 장소와 의료진과 분리된 장소에 있는 열명 정도의 환자들이 있었다. 낯선 이들의 얼굴은 조용했던 병동의 작은 소란을 이끌었고 그건 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어수룩한 학생 의사들은 열명 정도의 환자의 무리 속에서 각자의 담당 환자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만난 내 담당 환자는 남자 중학생이었다. 그는 키는 165정도에 앳된 피부와 안경 너머 약간의 경계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 둘은 그의 방으로 들어갔고 함께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에게 내려진 다소 폭력적인 진단명과는 상이한 그의 인상과 덩치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급격하게 안심이 됐다. 창 밖으로 볼 수는 있지만, 느낄 순 없는 봄을 풍경으로 두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봄의 햇빛 덕분인지 덩달아 기분이 들떠 밝은 목소리로 면담을 시작했다. 밝진 않지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질문들과 진단에 도움이 될 것만 같은 문답들이 오갔다. 내가 들어야만 하는 대답과 그가 들어야만 하는 질문들, 말하기 싫은 혹은 말하고 싶은 그의 희로애락들이 두서는 없지만 거짓 없이 오갔다. 하지만 환자와 대화하는 법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 의사와 사람 자체가 어색한 이 중학생은 친밀감보다는 서로 자신의 목소리만 낼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의사라기보다는 형사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둘은 솔직해지는 만큼 불편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질문이 끝나고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cpx에서 갈고 닦은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대뜸 그가 물었다.

선생님 생각엔 제가 언제쯤 나갈 수 있을 것 같으세요?”

..”

글쎄, 그걸 내가 말하는 건 주제넘은 짓인 것 같구나라는 말을 꾹 삼킨 채 그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주치의 선생님의 치료를 잘 따르다 보면 곧 퇴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나름의 성의 있는 대답을 끝으로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침대에서 떼어내려던 순간. 그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방금 퇴원에 대해 물었던 것은 비밀로 해주실래요?”

?”

퇴원이 늦어 질 것만 같아서요. 제가 퇴원 때문에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아직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형식적인 질문에 죄를 지은 범죄자마냥 답하기만 하던 그가 담을 수 있는 그의 모든 슬픔과 불안함을 담은 채 솔직한 질문을 했다. 분명히 그건 단순한 질문이 아닌 의학적 지식이 담겨야 답 할 수 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따뜻한 말을 건네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괜히 겁이 났다. 아름다운 봄의 햇빛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더욱 밝게 비추었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지긋이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의학지식을 한껏 훑어내었다. 새벽마저 이겨내던 흰 가운 뒤에 스스로마저 속아있던 나는 분명 면허를 받지 못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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